조용한 수다쟁이💜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우딴루 본문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우딴루
최소한 내년까지는 해외여행 특히 해마다 두세 번은 방문했던 사랑하는 여행지 대만을 갈 수 없을 것 같아 아쉬운 마음에 책과 영화로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5월에 읽은 첫 대만 소설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입니다. 이 소설은 1991년 대만 현지에서 개봉된 지 26년 만에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전설의 걸작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이 소설로 출간된 것입니다.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대만 뉴웨이브를 이끈 세계적인 거장 에드워드 양(양덕창) 감독의 작품으로, 전 세계에서 극찬을 받고 봉준호 감독 등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설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위대한 감독 에드워드 양 최고의 작품”이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넷플릭스에도 있지만 4시간이라는 러닝 타임 때문에 아직 영화를 보진 못 했는데, 책을 읽고 나니 대만의 고 서점가의 옛 풍경과 대만의 근현대사를 체험하는 간접 대만 여행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됩니다.
14살 소년 小四샤오쓰(장첸)는 중학교 야간부로 진학하게 되고 ‘소공원’파와 어울려 다닙니다. 그러던 중 샤오쓰는 양호실에서 小明샤오밍(양정이)이라는 이름의 소녀를 만나게 됩니다. 소녀는 소공원파의 보스 허니의 여자친구로 허니는 샤오밍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 조직인 ‘217’파의 보스를 죽이고 은둔 중이었습니다. 보스의 부재로 통제력을 상실한 소공원파는 보스 자리를 두고 혼란에 빠지는데 돌연 허니가 돌아오면서 소공원파 내부와 217파간의 대립이 격해집니다. 그리고 보스의 여자인 샤오밍을 사랑하게 된 샤오쓰도 이들의 싸움에 휘말리게 됩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1961년 대만에서 최초로 벌어졌던 ‘미성년자 살인사건’입니다. 에드워드 양 감독은 중국 공산당 집권 후 대륙에서 대만으로 건너간 한 가족을 통해 1960년대라는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어른들과, 희망을 찾지 못하고 폭력에 젖어드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사실적면서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대만 깡패들의 알력 다툼은 대만 내의 본성인과 외성인 같의 갈등을 대변하는 듯 합니다. 이를 통해 대만의 혼란했던 현대사와 폭압적인 대만 사회의 현실을 날카롭게, 한편으로는 매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4시간이라는 러닝 타임은 실제 사건과 더불어 이런 대만의 현대사, 당시의 현실을 보여주기에 긴 시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일면 납득도 됩니다.)
우딴루
대만의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유명한 방송 프로그램 사회자이다. 국립대만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중국문학 및 EMBA 석사 학위를 받았다. 외식, 자산관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을 펼치고 있으며 틈틈이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다채로운 인생을 즐기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사랑은 얻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이다』, 『똑똑한 여자는 사탕을 먹지 않는다』, 『사랑의 온도』 등이 있다.
에드워드 양 (시나리오 원작)
대만의 뉴 웨이브 영화를 주도한 감독. 1983년 장편 데뷔작 [해탄적일천]이 큰 흥행을 거두었으며, 1986년 [공포분자]로 로카르노영화제 은표범상을 받으며 세계적인 감독으로 이름을 알렸다. 대표작으로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독립시대], [하나 그리고 둘]이 있다.
후세의 평화를 위하여 기꺼이 역사의 아픔을 견뎌 냈던
우리 아버지 세대에게 바친다.
Edward Yang
등장인물 소개
샤오쓰小四본명은 장첸(張震). 장씨 집안의 넷째여서 샤오쓰란 애칭으로 불린다. 공부 잘하고 얌전한 모범생이었는데, 뜻밖에도 입학시험을 그르치는 바람에 야간 중학교에 들어간 뒤 ‘소공원파’ 패거리들과 휩쓸려 다닌다. 그러다 샤오밍이라는 소녀를 만나 사랑하게 되고, 예상치 못한 일에 휘말린다.
샤오밍小明본명은 팡샤오밍(方小明). 소공원파의 보스인 허니의 여자 친구로, 천식을 앓는 홀어머니와 단둘이서 어렵게 생활하며 직업학교에 다닌다. 청순한 외모와 묘한 매력을 무기로 가난한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화근이 되고 마는데…….
캣小貓王샤오쓰의 절친으로 본명은 왕따리(王大立).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에 빠져 살면서 소공원파가 기획하는 콘서트에서 가끔 노래를 부른다.
샤오마小馬본명은 마쯔신(馬志新)으로 권력과 돈을 모두 갖춘 군 장성의 외아들이다. 다른 학교에서 칼로 사람을 찌르는 사고를 쳤지만 아버지의 빽으로 샤오쓰의 반에 전학 왔다. 샤오쓰에게 호감을 갖고 친해지고 싶어 적극적으로 다가오지만…….
타이거劉名虎 샤오쓰와 동급생이지만 친하지는 않다. 샤오밍을 사이에 두고 샤오쓰와 기싸움, 몸싸움을 벌인다.
허니哈尼소공원파의 보스로, 샤오밍을 차지하기 위해 217파 보스를 죽인 뒤 도피 중이다.
탸오條子허니의 친동생. 은신 중인 허니를 대신해 소공원파를 이끌지만, 성격이 모질지 못해 부하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싸움보다는 노래를 더 좋아하고, 콘서트에서 직접 노래하기도 한다.
슬라이滑頭 소공원파의 조직원. 탸오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호시탐탐보스 자리를 노리다, 반대파인 217파에 회유당해 조직을 배신한다.
산동山東 당구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217파의 보스. 슬라이를 이용해 소공원파를 무너뜨리려 하다가 탸오에게 반격을 당한다.
장따오이張道義 샤오쓰의 아버지. 중국에서 이주해 온 뒤 공무원 생활을 하며 일곱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어깨가 무겁다. 원칙주의자, 논리적인 이상주의자이며 다섯 자녀 중 샤오쓰를 가장 사랑한다.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샤오쓰(小四)가 살인을 하리라고는. #첫문장
아버지 장따오이는 평생 공무원 생활만 한 사람이다. 중국 대륙에 있을 때도 정부의 봉급을 받았으며, 바다 건너 대만으로 피난 온 후에도 정부에서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박봉을 월급으로 받고 있다.
그 와중에 아이들은 하나씩 늘어 어느새 다섯이 되었다. 때문에 생활은 갈수록 어려워졌고 여기저기에서 돈을 꿔 메우느라 가계부 쓰는 건 엄두조차 낼 수 없게 되었다. 풍채 좋던 몸은 시간이 갈수록 바람 속의 대나무처럼 말라 갔다. 게다가 중년에 들어선 후부터는 대만 특유의 더위와 습기 때문인지 몸에 하나둘씩 이상 신호가 나타났다. 그가 갖고 있던 꿈과 이상은 기침과 류머티즘이 심해지는 것과 비례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요즘 여자애들은 단정하지가 못해. 결혼도 안 했는데 남자를 데리고 버젓이 길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다니.” p.26
샤오쓰는 전부터 샤오밍이란 이름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건국중학교 부설 직업학교 2학년이었다. 탸오의 형 허니가 사라지기 전까지만 해도 소공원파 패거리는 모두 샤오밍을 형수처럼 대했다. 허니가 그녀를 여자 친구로 삼았기 때문이다.
남녀칠세부동석을 따지던 시대는 지났지만 남녀 관계에 대한 인식이 아직도 완전히 개방된 때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아직까지도 남자와 여자가 나란히 길을 걷고 있으면 사람들이다 쳐다볼 정도였다.
걸 헌팅. 이런 표현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느낌은 땅에 떨어진 아이스크림과도 같았다. 달콤한 맛은 있지만 청결하지 못하고 더럽다고 느끼기 때문이었다.
샤오쓰는 샤오밍이 허니의 여자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자가 한 남자에게 속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느 정도의 관계를 뜻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지 못했다.
캣은 아직도 사춘기가 오지 않아 이성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다 큰 것처럼 허세를 부리느라, 고령가(牯嶺街, 타이베이의 유명한 고서점 거리)에 가서 음란 서적을 사며 한껏 폼을 잡았다. 하도 자주 사러 가다 보니 어느덧 단골처럼 익숙해져 버려서, 캣이 고령가를 배회하고 있으면 책방 아저씨가 그를 알아보고 불러 세울 정도였다.
“야! 꼬마야. 새로운 책 들어왔다.” p.28
어쨌거나 농구장에서 남자와 여자가 단둘이 공놀이를 하는 건 조금 불건전해 보였다. 샤오쓰는 그 모습을 보며 샤오밍이 겉보기에 아무리 청순하게 생겼어도 속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샤오밍을 직접 알게 되면서 샤오쓰의 그런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p.29
‘나도 샤오밍을 멀리해야 할 거야. 샤오밍 때문에 터지는 귀찮은 일들이 너무 많아. 왜 예쁜 애들은 꼭 얼굴값을 하면서 화근을 만드는 걸까?’ p.43
허니와 함께한 날들은 샤오밍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시간이었다. 허니가 난민촌 패거리인 217파의 우두머리와 결투를 벌인 것은 그녀를 위해서였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던 날 허니는 취해 있었지만, 밤에 목숨을 건 싸움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만약 죽은 사람이 허니였다 해도 나는 결코 놀라지 않았을 거야.”
샤오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처럼 청순하고 예쁜 여자애가 그동안 대체 어떤 일들을 겪은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샤오밍은 상대방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날 밤만큼 허니를 깊이 사랑한 적이 없어. 그는 그냥 외롭게 나한테서 떠나갔어. 외롭게 가 버린 거야. 하수도를 지나 학교 담장을 넘어 갔어. 혼자서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러 간 거야. 난 그제야 비로소 허니를 이해할 수 있었어.”
샤오밍은 점점 더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난 사실 내가 허니의 당당함과 멋을 좋아하는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날에야 비로소 깨달은 거야. 내가 그의 외로움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겠니? 허니는 언제든 나를 위해 죽으러 갈 수 있었던 거야.”
푸르스름한 달빛만 조용히 땅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한 방울 눈물이 샤오밍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샤오쓰는 뚜렷이 볼 수 있었다.
사랑이란 과연 어떤 감정일까. 샤오쓰는 난생처음 사랑이라는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p.45
“괜찮다. 네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자전거를 밀면서 한참을 걸어간 후에야 비로소 아버지가 말을 꺼냈다.
아버지는 샤오쓰를 위로함과 동시에 자기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다. 자신 역시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다고.
“공부한다는 게 결국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게 아니겠니? 그다음은 자신이 깨우친 진리를 믿으면서 그에 따라 용감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난 이번 사건을 통해 네가 충격을 받기보다는 용기를 냈으면 좋겠구나. 네 꿈은 네가 만드는 거야. 노력하기에 달렸지.”
말을 마친 아버지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담배를 꺼냈다.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지는 10년 정도 되었다. 생활의 짐이 무거워지면 무거워질수록 담배를 피우는 양도 무섭게 늘어났다.
돈이 있을 때는 ‘장수(長壽)’를 피우고, 돈이 떨어지면 ‘신락원(新樂園)’을 피웠다. 아버지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궁핍한 현실은 그에게 좋아하는 담배를 피우는 즐거움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지난 10여 년 동안 아버지에게 있어 여유와 궁핍의 상징은 단지 ‘장수’를 피울 때와 ‘신락원’을 피울 때의 차이일 뿐이었다. p.49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뭐하러 겁을 내?”
이런 건 샤오쓰가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사고방식이었다. 자신이 정당하면 세상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 p.64
모든 문제의 근원은 어머니의 병이었다. 어머니는 대만에서 홀몸으로 애를 키워야 하는 여자라면 흔히 볼 수 있는 비참한 처지에 빠진 것이다.
식모 일을 하던 집에서 쫓겨날 때마다 외삼촌네가 마지막 피신처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외삼촌은 싸늘한 시선으로 두 모녀를 노려보곤 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어머니처럼 선량한 사람도 뻔뻔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어머니는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샤오밍을 데리고 외삼촌 집으로 들어갔다. p.53
“그동안 타이난에서 숨어 있었는데 너무 지루해서 매일 무협 소설만 몇십 권씩 읽었어. 나중엔 가장 두꺼운 소설을 빌려다 달라고 했지.”
그는 매일 방 안에 처박힌 채 줄창 소설만 읽었는데 지금은 그중 딱 한 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만 선명하게 기억난다고 했다.
“정말 소설을 쓰고 싶었지. 아쉽다……. 읽은 책은 별로 없고…….”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를 마친 허니는 샤오쓰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장난기 어린 그 미소의 의미를 샤오쓰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웃음을 보니 항간에 신화처럼 남아 떠도는 허니에 관한 이야기가 전부 새빨간 거짓말처럼 여겨졌다.
어찌 보면 허니 역시 남들과 같은 평범한 소년에 불과한 게 아니었을까. 사람이란 존재 자체가 겉으로는 굳세 보여도 속은 약하고 고독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p.57
마음이 아프지 않다고 했지만 거짓말이었다. 샤오밍은 차라리 영원히 열이 내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아픈 상태에 있으면 오히려 고통스러운 기분을 덜 느낄 수 있었다.
신문에는 지명수배 중인 범죄자가 의외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내용으로 간단한 기사가 실렸을 뿐이다. 허니는 어차피 범죄자이니 인과응보라는 논조였다.
캣과 비행기는 허니가 중산당에 혼자 나타났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연히 패거리들과 함께 갔어야 했다는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샤오마는 허니가 죽기 전에 산동과 함께 있는 걸 보았다고 자신 있게 얘기했다.
샤오쓰는 허니의 죽음을 그들과는 다르게 받아들였다. 허니가 스스로 죽음을 찾아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샤오쓰는 허니의 야릇한 미소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왠지 모르게 그가 모든 사실을 다 간파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니와는 딱 두 번 만났을 뿐이다. 하지만 샤오쓰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친근감을 그에게 느끼고 있었다. p.70
돌아오지 않는 강감독오토 프레밍거출연로버트 미첨, 마릴린 먼로, 로리 칼혼개봉1955. 11. 04.
“일본이 항복한 다음 작은 백합은 지룽 항(基隆港, 대만 북부 지룽 시에 있는 항구)에 가서 남자 친구가 탄 배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지. 정박하고 있던 배들은 한 척씩 한 척씩 떠나 버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의 멋진 남자 친구는 보이지 않았어. 가엾게도 작은 백합은 날이 지날수록 남자 친구가 전사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그래서 지금 내 가방 안에 들어 있는 이 칼로 이루지 못한 사랑을 한탄하며 자살하려 했던 거지.”
캣은 침까지 튀겨 가며 창작해 낸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때 라디오에서 장제스 총통의 목소리가 들렸어. 일본 사람들을 모두 무사히 본국으로 돌려보낼 거라는 내용이었지. 그녀의 슬펐던 마음은 갑자기 기쁨으로 바뀌었고 결국 일본으로 돌아가서 딴사람한테 시집을 가고 만 거야.”
“제길……. 정말 터무니없는 말만 늘어놓는군.” p.78
아버지가 경찰 총국에 연행되어 갔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세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다시 돌아오지 못하거나 아니면 반쯤 죽은 상태로 돌아올지 모른다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당시 아버지의 몸은 허약했고 평소에도 기침이 몹시 심했으므로 더욱 걱정이 되었다. 아버지가 만약 고문을 당한다면 어떻게 견뎌낼 수 있겠는가.
며칠 동안 어머니는 사방팔방으로 도움을 청하러 다녔다. 그중에서도 특히 왕고우 아저씨 댁에 자주 드나들었다. 아저씨는 국민당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므로 어떤 정보든 약간이라도 더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p.84
“그래, 알았다. 네가 잘 대접하렴. 난 방에 가서 경극이나 듣고 있을 테니까.”
어머니의 말은 발음이 정확하고 어조가 부드러운 북경어였다. 옷도 꼿꼿하고 단정하게 다림질되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고관대작의 부인이라는 걸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샤오마에게 보내는 지극한 사랑이 샤오쓰와 샤오밍에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들은 그런 관계가 무척이나 부러웠다.
어머니가 방으로 가자마자 샤오마는 아버지가 두고 간 권총을 몰래 꺼냈다. 그는 은밀한 표정을 지으며 그것을 둘에게 보여 주었다.
“이것 좀 볼래? 지난번에 보여 준 건 사냥총이었잖아. 우리 이번엔 진짜 권총을 가지고 놀아 보자.” p.87
일주일이 지난 후에야 아버지는 수염이 꺼칠꺼칠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이 왜 경찰 총국에 끌려갔어야 했는지 아직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경찰 한 명에게 일주일 내내 집요한 취조를 당했다. 이 사람을 아는가? 저 사람을 아는가? 아버지는 착실하게 질문에 대답했지만 그중에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취조하던 경찰은 만족스러운 기색이 아니었다. 진술서를 쓰라고 하기에 밤낮으로 써서 넘겨주었다. 일주일 동안 써 낸 진술서가 마치 자신이 살아온 모든 일을 다 기록한 자서전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왜 풀어 주는지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다만 석방시키기 전에 취조 경관이 그의 오랜 친구인 왕고우에 대해 잠시 언급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 일이 그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사건 이후로 부부 사이는 살얼음판 같았다. 모든 일에서 사사건건 부딪혔으며 가면 갈수록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아버지는 자기 자신을 위안할 이유만 찾고 있었다. 어머니의 고민은 달랐다. 남은 생은 아무래도 가난하고 평범하게 지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본인도 딱히 무서운 건 없었다. 다만 아버지의 무능력이 아이들의 발전에 해를 끼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장쥐안은 뛰어난 성적으로 토플에 합격했다. 학교에서 장학금도 나왔다. 외국 유학을 간다면 아무래도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갈 것이다. 그 아래 둘은 성적에 대해 큰 걱정을 안 해도 되지만 그래도 학비 부담이 적지 않았다.
샤오쓰의 눈은 근시가 더 심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여유가 없어서 안경도 사 주지 못했다. 시력이 점점 나빠지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막내 장완은 아직 초등학생으로, 엄마 품에 안겨 재롱을 부리는 꼬마에 불과했다. 살아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고 험했다. p.89-90
가난한 탓에 친척들은 모두 길거리 똥개 피하듯이 샤오밍 모녀를 피하려 들었다. 샤오밍은 이미 세상의 가혹함과 친척들의 냉혹함을 철저히 맛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남들을 탓하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그녀에게는 청춘의 젊은 육체만 있을 뿐이었다. 샤오밍이 내세울 거라곤 그것 하나밖에 없었다. 아무 데도 의지할 곳이 없었으므로 자기 자신에게 의지해서 현실과 싸워 나가야만 했다. p.90
“이런 일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일…… 너 같은 애들은…… 몰라.”“내가 뭘 모르는지 선생님이 알아요?”샤오밍은 몸을 더욱 밀착시키면서 장난기 어린 눈으로 의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의사의 가슴이 뛰고 있었다. 빠르지만 힘이 없는 심장 박동 소리, 그것은 의지가 약한 사람에게서나 들을 수 있는 심장의 울림이었다. 샤오밍은 언제든지 그를 유혹할 수 있다고 여겼다.“나도 다 알아요. 경험이 없는 게 아니라고요.”이 말이 의사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무슨 경험?”“맞혀 봐요.”샤오밍은 계속 딴전을 부렸다.“이런 일은 함부로 하면 안 돼. 너 스스로 조심해야지.”그는 열다섯 살 소녀가 남녀 관계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의사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샤오밍을 쳐다보았다. 천진난만한 웃음 속에 무엇인가 다른 의도가 숨겨져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의도가 자기를 향해 뚜렷하게 다가오고 있었다.그제야 의사는 샤오밍이 이러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걸 알아챘다. 아무래도 샤오밍 또래의 소녀들은 아무리 두꺼운 보호막으로 가려도 속마음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는 법이다.“어머니 치료비는 걱정하지 마라.”그는 가볍게 샤오밍의 손을 잡고 제자리에 놓아 주었다.“다음에 또 어머니가 발작을 일으키면 일찍 모시고 와.”의사 선생은 샤오밍을 아꼈고 또한 돕고 싶었다.“그런데 너 도대체 무슨 경험이 있는 거니? …… 지금 남자 친구는 누구니?” 샤오밍은 웃으며 장첸이라고 대답했다.p.91
아버지는 학생과에 두 번씩이나 와서 아들의 근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당당하게 대꾸하지 못했다. 경찰 총국에 끌려갔다 온 후로 아버지는 이상할 정도로 불안해하고 겁이 많아졌다. 그는 의기소침한 자세로 앉아 학생 과장이 욕하는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아버지로서는 더 이상 방법이 없었기에 일본 사람들처럼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사과할 따름이었다.
“다 내 잘못이에요. 내가 잘못했다고요.”
가만히 듣고 있던 샤오쓰가 고개를 들었다. 자기 때문에 아버지가 저토록 모욕을 당하면서 인격을 짓밟히고 있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라 누군가 건드리기만 하면 바로 폭발할 것 같았다.
그때 학생 과장이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덧붙였다.
“당신이나 나나 다 정부의 녹을 받고 사는데 왜 이렇게 굽실거리나…….”
샤오쓰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바로 옆에는 압수당한 야구 방망이가 있었다. 그걸 집어 높이 치켜들었다. 학생 과장이 그 모습을 발견했을 때 숨을 곳은 보이지 않았다.
주변은 갑자기 침묵에 빠졌다. 일순 학생과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박제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학생 과장 책상 위에 달린 전구가 산산조각 난 것이다. 앙상하게 남은 전선만이 허공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샤오쓰는 퇴학을 당하고 말았다. p.95
“샤오밍은 이미 오래전에 이사 갔어.”
“어디로 갔는데?”
샤오쓰는 그녀를 찾아야만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찾지 않는 게 좋을걸.”
샤오쓰의 머릿속이 온통 의문으로 뒤섞였다.
“그 말 도대체 무슨 뜻이야?”
샤오신찡은 무언가 한참 생각하더니 엉뚱한 말을 꺼냈다.
“아버지가 없는 애들은 길들이기가 힘들어.”
“아버지? 금문도에 있잖아.”
샤오쓰는 샤오밍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군인이어서 자기도 아들이었다면 아빠처럼 군인이 되고 싶다고 했던 말을.
샤오쓰의 말을 듣고 샤오신찡은 애매한 표정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그년, 또 그 방법을 썼구만.” p.98-99
“제기랄. 대체 무슨 뜻이야? 샤오밍이 날 찾아온 거지 내가 걔를 먼저 꼬신 게 아니야. 여자라는 족속은 다 똑같은 거잖아. 다 헤프고 쉬울 뿐이야. 그러지 말고 같이 들어가자.” p.100
샤오추이는 옷에 붙은 먼지를 털면서 지저분하다는 듯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바보들! 누가 정말 천박한 건지도 모르고! 그런 년을 위해서 목숨을 거는 일이 가치 있는 거라고 생각하니? 차라리 나를 위해 죽는 게 어때?”
그러더니 곧 모든 걸 포기한 것처럼 비참한 표정을 짓더니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그년은 샤오마하고 같이 있겠지. 샤오마네 집엔 돈이 많으니까. 없는 게 없잖아? 그런데 걔가 너를 다시 생각할 거 같아?”
“그만! 그만해!”
샤오쓰는 더 이상 샤오추이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샤오밍은 도대체 어떤 여자란 말인가. 샤오쓰에게 샤오밍은 순수한 연꽃과 같은 대상이었다. 식물원 연못에 피어 있던 아름답고 새하얀 연꽃. 그런데 샤오추이는 왜 이렇게 그녀를 비난하고 있는 것일까. p.104
“그들은 다 너를 위해 죽은 거야. 그렇지만 넌 아직도 게임을 끝내지 않았어. 넌 너무 잔인해.”
“그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래?”
샤오밍은 설교투의 말을 듣는 게 참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어렵고 힘들게 살아왔다. 자기가 도움이 필요할 때 샤오쓰는 손을 내밀어 주기는커녕 얼굴조차 비친 적이 없었다. 근본적으로 샤오쓰는 자신을 도울 능력이 없었다. 그런데 무슨 권리로 이 일에 끼어든단 말인가.
“네가 죽고 싶다면 죽으러 가도 괜찮아. 그건 나와는 아무 상관 없어.” p.107
한 번 또 한 번, 샤오쓰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가슴에 자꾸만 상처를 내고 있었다.
“넌 노력하지 않았어. 나약할 뿐이야. 넌 항상 남들에게 거짓말만 했어. 나도 계속 속였어.”
샤오밍의 가슴에 일곱 개의 상처가 남았다. 비수가 일곱 번째로 가슴을 찔렀을 때 샤오쓰는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그는 녹초가 된 채 울고 있었지만 소리를 낼 기력조차 없었다. 그저 거리 한 모퉁이에서 처참하게 흐느낄 뿐이었다. p.108
열다섯 살이 되던 그해에 샤오쓰가 사람을 죽였다는 걸 아무도 믿지 않았다. 심지어 그 자신도 믿을 수 없었다.#마지막문장
언젠가 당신의 고전 열 편에 들고야 말 걸작,혹은 이미 그런 까닭 정성일(영화평론가)
1961년 6월 15일 밤 10시, 타이베이 시의 고령가(牯嶺街, Guling Street) 길거리에서 한 중학생 소년이 인근 학교 중학생 소녀를 칼로 찔러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대만에서 벌어진 첫 번째 미성년자 살인사건이라고 한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이 실화를 영화로 다룬 것이다. 여기까지만 알고 영화를 보게 되면 당신은 몹시 당황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3시간 57분에 이르는 상영 시간에 망연자실해질 것이며, 그런 다음 이 긴 영화를 보아도 정작 맨 마지막에 소년 샤오쓰(小四)가 소녀 샤오밍(小明)을 왜 죽였는지 잘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 이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회로를 거쳐야 한다.<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연출한 에드워드 양에게 이 사건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매우 특별한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첫 번째는 이 사건이 벌어졌을 때 에드워드 양은 샤오쓰와 동갑이었다. 자기와 동갑인 소년이 깊은 밤, 사람들이 오가는 대로변에서 소녀를, 그것도 진술에 따르면 사랑하는 소녀를 칼로 찔러 죽인 기사를 신문에서 읽었을 때의 심정. 하지만 두 번째 이유가 더 중요했을 것이다. 샤오쓰는 상하이에서 태어난 다음 가족들과 함께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을 따라 대만으로 이주한 소년이다. 아마 1949년 12월 7일 전후의 일이었을 것이다. 에드워드 양은 1947년 상하이에서 태어나 부모를 따라 대만으로 이주하였다. 대만에서는 원래부터 대만에 살던 사람을 번성런(本省人)이라 부르고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사람들을 와이성런(外省人)이라고 부른다. 장제스가 이끄는 와이성런들은 평화롭게 대만으로 이주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국민당은 대만을 점령하였고, 그런 다음 장제스는 총통이 되었다. 대만을 식민지로 점령했던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다음 물러나자 중국 본토에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와 그의 국민당이 대만으로 후퇴하였다. 번성런들은 갑작스럽게 중국 본토에서 이주한 와이성런들이 주인 행세를 하자 반발하였고, 이에 1947년 2월 28일에 시작된 국민당의 탄압은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번성런들을 ‘빨갱이’로 몰아서 무자비하게 학살하거나 정치범으로 몰아서 고문하였다. 대만은 섬이기 때문에 달리 도망칠 곳이 없었고 수많은 번성런들은 실종되거나 체포되었다. 그 과정에서 3만 명이 죽었고 14만 명이 감옥으로 보내졌다. (이것이 허우 샤오시엔의 <비정성시>의 배경이다.)
비정성시감독허우 샤오시엔출연양조위, 진송용개봉1990. 01. 26.
그런 다음 침묵이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와이성런들이 모두 장제스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대만에 온 많은 와이성런들은 곧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잠시 대만에 머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사는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거의 동시에 한국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진 지 5년만의 일이다. 고향에 돌아갈 가능성은 희미해져 갔고, 장제스는 독재 정치를 시작하였다. 그러는 동안 마오쩌둥은 자신에게 반대하는 정파를 숙청하기 위해 1957년 덩샤오핑에게 반 우파(反右派) 운동을 맡겼고, 그 과정에서 50만 명에 달하는 지식인들이 사라졌다. 그런 다음 그해 여름 대약진 운동을 개시하였다. 중국 본토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이야기가 시작하기 2년 전의 상황. 어린 에드워드 양도, 어린 샤오쓰도 이 모든 것을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상하이에서 건너온 그의 아버지, 혹은 아버지의 친구들, 그리고 어머니, 친척들이 밤마다 모여 두런거리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불길한 밤. 깊은 한숨 소리. 장제스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이번에는 자신을 따라 본토에서 대만으로 이주했지만 국민당에 비판적인 지식인들을 ‘간첩’으로 몰아서 체포하거나 구속시켰다.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대만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 그러나 우리들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막 시작되는 첫 장면에서 ‘民國 四十八年 夏(1959년 여름)’라는 자막이 올라올 때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한다. 정확하게 그만큼의 간극이 이 영화와 이 영화를 보는 우리 사이에 내내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이 에드워드 양이 이 영화에서 하려는 바로 그것이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샤오쓰의 심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거나 상황을 설명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 대신 에드워드 양은 그 사건 앞에서 몹시도 곤혹스러웠던 그해 여름, 그 기분, 그 경험을 다시 한 번 느껴 보려고 한다.
에드워드 양은 <비정성시>로부터 15년 후로 옮겨 온 다음 타이베이의 거리 고령가에서 벌어진 중학생 소년 살인사건을 다루었다. 이 사건이 당시 대만 사회에 충격을 주긴 했겠지만 역사적 사건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드 양은 이 사건을 중심에 놓고 마치 거미줄처럼 서로 얽혀 있는 1961년의 대만을 연결해 나가기 시작한다. 거대한 거미줄. 여기에 먹이가 하나 걸려들면 전체 거미줄에 반응이 온다. 하지만 동시에 미동도 하지 않는 거미줄,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사건의 규모가 아니라 사건의 강도에 관심을 갖고 그 주변에로 확장시켜 나간다.
하나의 가족이 있다. 아주 평범한 가족. 하지만 고향을 잃은 가족. 뿌리가 없는 가족.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다섯 남매. 그런 다음 다시 두 개의 세계로 나눈다. 하나는 아버지의 세계이다. 상하이에서 국민당과 함께 대만으로 건너온 아버지는 지식인이었고 안정된 삶을 살았지만 지금은 만성적인 실직 상태에서 함께 이주한 고향 친구인 왕(王) 선생에게 매달려 구직을 부탁하는 형편이다. 왕 선생은 금방이라도 직장을 구해 줄 것처럼 말하지만 차일피일 미루면서 이런저런 부탁을 한다. 이 무기력한 아버지의 세계. 다른 하나는 넷째 어린 아들 샤오쓰의 세계이다. 영화는 에드워드 양과 같은 나이였던 샤오쓰를 쫓아간다. 일종의 전기적인 기술.
아버지의 세계와 샤오쓰의 세계. 이 두 개의 세계는 끝내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샤오쓰가 왜 성적이 떨어지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낮에 샤오쓰가 어디를 쏘다니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밤마다 샤오쓰가 공부를 하느라 집에 늦게 들어온다고 생각한다. 성적 때문에 학교에 불려 간 아버지가 샤오쓰와 함께 집에 돌아오면서 대화를 하지만 그게 전부이다. 두 개의 세계는 평행선을 긋는다. 샤오쓰는 길거리를 지나가는 탱크를 보지만 그게 무얼 뜻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며 알고 싶지도 않다. 샤오밍과 데이트를 하면서 멀리서 훈련받는 군인들을 보지만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다. 군인 장성을 아버지로 둔 샤오마의 집에 놀러가 총을 쏘아 보기도 하지만 그게 전부이다. 샤오쓰의 세계에서 어른들의 세계, 아버지의 세계, 장제스의 세계, 두 개로 나누어진 두 개의 중국은 아무 상관 없는 일이다. 그런데 정말 아무 상관 없는 일일까. 대만 번성런인 허니가 이끄는 조직 소공원파와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부모를 가진 아이들이 만든 217파의 긴장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왜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감을 보여 주는 게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두 조직을 제멋대로 오가면서 연애에 열중하는 샤오밍은 단지 자유롭게 상대를 만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녀가 왜 그렇게 소년들을 긴장시키는 것일까. 에드워드 양은 우리에게 그 긴장을 설명할 생각이 없다. 이 긴 영화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아도 관계는 느슨하고 심지어 이야기의 윤곽조차 잘 잡히지 않는다. 반대로 에드워드 양은 거의 신경증적으로 보일 만큼 디테일에 집착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기억을 복원하려는 듯이 카메라가 건드리는 모든 것들에서 그 흔적을 불러들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비정성시>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미장센으로 디테일을 발전시켜 나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에드워드 양은 허우 샤오시엔과 달리 할 수만 있으면 공간을 비워 나가기 시작한다. <비정성시>는 모든 쇼트가 기억의 미장센으로 빼곡히 차 있다.
반대로 에드워드 양은 종종 헐벗은 것처럼 텅 빈 화면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는 마치 기억의 일부가 닳아 없어진 것처럼 그렇게 다룬다. 그런 다음 종종 사라져 버린 일부를 향해서 영화가 탄식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래서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사실주의의 전통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종종 빛과 그림자로만 이루어진 표현주의 영화의 장면처럼 진행된다. 그때 기억은 역사의 알레고리가 된다. 이 불균질한 구성의 영화는 그 과정에서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영화를 한참 보았는데도 거의 같은 장면에 계속 되돌아와서 본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에드워드 양이 이론적인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니지만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장제스의 시대가 독재를 시작하면서 권력의 전략이 작동되는 공간에서 긴장과 불안이 어떻게 일상생활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하는지를 미세하게 바라보려고 한다. 이 그물망을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는 것처럼 모든 등장인물들은 같은 공간으로 마치 붙잡힌 듯이 돌아오고 되돌아온다. 대만이라는 섬나라. 마치 유배당한 듯한 장소, 감옥처럼 관리되기 시작한 시간. 물론 어린 샤오쓰와 그의 친구들은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모른다. 어쩌면 샤오쓰의 아버지도 그걸 모를지 모른다. (이 이중의 부정이라니!) 그러나 두 개의 세계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불안에 사로잡힌다. 아버지는 정신이상 속에 집에 누군가 숨어 있다, 면서 불안에 사로잡히고 샤오쓰는 샤오밍이 자기 몰래 남자들을 만나러 다닌다, 면서 불안에 사로잡힌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불안을 가져온 올바른 대상을 보지 못한다. 불안은 전염병처럼 번져 나간다. 샤오쓰는 불안을 탈출하기 위해서 불안의 (잘못된) 대상에 벌 내리는 것으로 불안을 끝낸다. 완전한 오류, 아무것도 끝낼 수 없을 때 무능력한 자리에서 남은 선택은 자기 자신을 파멸시키는 것이다. 왜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일까. 그것을 견딜 수 있는 한계를 지나쳐 버릴 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세계를 폭파시키든지 아니면 자기를 삭제하든지의 양자택일. 하지만 어린 샤오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샤오쓰는 자신의 문제를 칼로 찌른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영어 제목 <A Brighter Summer Day>는 ‘소년 엘비스’ 캣이 부르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 ‘오늘 밤 당신은 외로운가요(Are you lonesome tonight)’의 가사에서 가져온 것이다. 캣은 무대에서 마치 엘비스 프레슬리가 된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가녀린 목소리로 노래 부른다.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년의 목소리. 그는 이 녹음을 미국의 엘비스에게 보낸 다음 답장을 받는다. 그걸 자랑하기 위해 녹음테이프를 들고 형무소를 찾아가지만 간수는 쓰레기통에 버린다. 샤오쓰의 그해 여름은 찬란하지 않았다. 혹은 에드워드 양의 여름은 그렇지 않았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처음 개봉되었을 때 이상할 정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비평가들, 영화감독들이 이 영화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훗날 칸 영화제 집행위원장 질 자콥은 그 자리를 떠나면서 자신이 놓친 영화 열 편 중 하나로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뽑았다. 2015년 부산영화제에서 전 세계 영화평론가, 영화제 프로그래머, 영화 기자들 73명에게 아시아 영화사상 최고의 걸작 100편에 관한 앙케트를 했을 때는 7위에 올라왔다. (1위는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였다.) 내 생각에 이 순위는 점점 더 올라갈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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